정부가 그동안 민간 자율에 맡겨져 파편화되어 있던 자발적 탄소시장을 제도권 안으로 전격 편입한다. 기획예산처는 27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 등 주요 관계자와 대·중소기업,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얼라이언스 출범식’을 개최하고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조성 방향’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법을 제정해 시장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법적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올해 말 한국거래소 내에 정식 거래소를 신설해 표준화된 거래를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규제 중심의 배출권거래제가 가격 정체 등으로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이번 조치가 국내 온실가스 감축 동력을 다각화하고 한국을 아시아 탄소금융의 허브로 도약시키는 전환점이 될지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 기제는 지난 2015년부터 운영된 배출권거래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배출권거래제는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71%를 커버하며 핵심 역할을 해왔으나, 연평균 배출량이 일정 기준 이상인 대기업 위주로만 설계되어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지자체의 자발적인 감축 유인을 이끌어내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명확했다.
최근에는 배출권 공급 과잉과 낮은 유상할당 비중 등으로 인해 시장 내 배출권 가격이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기업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배출권을 사는 것이 직접 감축 기술에 투자하는 것보다 유리해지는 시장 감축 기제로서의 왜곡 현상까지 발생했다.
정부가 꺼내 든 자발적 탄소시장 제도화 카드는 바로 이 배출권거래제 비규제 대상인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0% 영역에 강력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전략이다. 규제에 등 떠밀려 하는 감축이 아니라, 탄소 감축 성과를 신뢰성 있는 탄소크레딧 자산으로 인정해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물길을 터주겠다는 의미다.
글로벌 자발적 탄소시장은 기업의 넷제로 선언과 맞물려 급성장했으나, 최근 크레딧의 실제 감축 효과 부풀리기인 이른바 그린워싱 논란으로 혹독한 신뢰성 위기를 겪은 바 있습니다. 정부 역시 이번 대책에서 가장 방점을 둔 키워드로 신뢰 기반의 생태계 조성을 꼽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시장의 제도적 근거가 될 자발적 탄소시장법 제정을 조속히 추진한다. 법 제정을 통해 정부 공인 등록기관이 탄소크레딧의 발행부터 유통, 최종 소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유기적으로 추적·관리하는 촘촘한 체계를 마련할 계획이다.
아울러 민간 평가기관들의 평가지표와 검증 프로세스를 대중에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유도하여 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투명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방침이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개회사에서 지금 글로벌 탄소시장은 얼마나 줄였는가만 묻지 않고 감축이 신뢰 가능한지를 함께 엄격히 묻고 있다며, 정부는 우리 시장에서 거래되는 감축 실적이 국내외에서 믿을 수 있는 자산으로 인정받도록 촘촘히 관리할 것이며 이제 탄소 감축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도적 인프라의 핵심 축은 한국거래소가 담당하게 됩니다. 한국거래소는 올 연말까지 정식 KRX 탄소크레딧시장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거래 중개에 나설 예정이다. 분절되어 있던 기존 민간 시장의 탄소크레딧을 통합적으로 거래하고, 다양한 크레딧을 상품군별로 표준화해 거래 편의성을 대폭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자발적 탄소시장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측면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하며, 지난 11년간 법정 배출권시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노하우를 이식해 세계적 허브로 발전시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한국거래소는 국내 시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탄소크레딧 거래소, 해외 등록기관, 투자자 등과의 협력을 통해 해외 연계거래를 추진하고 해외 유동성을 국내 시장으로 적극적으로 유치할 계획이다. 앞서 거래소는 지난해 9월 세계 최대 탄소크레딧 거래소 운영사인 미국의 엑스팬시브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으며, 이를 발판 삼아 국제적 신뢰도를 확보해 나갈 예정이다.
이날 출범한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얼라이언스는 시장을 조기에 안착시키기 위한 핵심 민·관 협력 거버넌스로 운영됩니다. 대한상공회의소를 사무국으로 하여 탄소크레딧의 수요와 공급을 촘촘하게 연결하고 현장의 기업들이 겪는 규제 애로사항을 수렴해 제도 개선 과제를 발굴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번 정부의 대책은 지지부진하던 국내 자발적 탄소시장에 강력한 제도적 메스를 댔다는 점에서 시장의 큰 환영을 받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2027년 의무화되는 국제항공탄소상쇄·감축제도(CORSIA)나 파리협정 제6조 등 글로벌 규제 표준과의 정교한 호환성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공인한 투명한 법적 테두리와 한국거래소의 안정적인 매매 시스템, 그리고 민간의 기술 혁신이 결합한다면 대한민국은 기후 위기 대응과 탄소금융 산업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며, 민·관 얼라이언스의 첫걸음이 아시아 탄소시장의 판도를 바꿀 지각변동으로 이어질지 기대된다.(한국탄소신문=유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