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CBAM과 대러제재 위기를 독보적인 경쟁력으로 정면 돌파한 강소기업 탐방

(사진 설명 : 인터뷰에 응한 박응범 소장은 CBAM 서류작업 외에 이 회사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수차례 처리할 업무가 생겨 대화가 중단됐다. 창고에서 수입한 물건을 지계차로 옮기는 박응범 소장)
2차전지 양극재 핵심 원료인 ‘리튬’, ‘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등 미세 광물 분말 이송 공정에 독보적인 기술을 가진 한 중소기업체가 겪은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극복기
“유럽의 가장 까다로운 환경 규제와 지정학적 원산지 제재까지 정면 독파해 독보적인 파트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거대한 장벽이었던 규제들이, 이제는 후발 주자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우리만의 강력한 진입장벽이 되었습니다.”라는 말로 인터뷰에 응한 박응범 소장(64세)은 말문을 열었다.
이 회사는 글로벌 2차전지 시장의 핵심 거점인 유럽에서 대한민국 정밀 설비 제조 기업의 위상을 드높인 강소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온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파고와 엄격한 러시아산 철강 배제 조치를 대한민국 환경부의 가이드라인과 끈질긴 공급망 추적 기술을 무기 삼아 정면 돌파했다. 그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인터뷰에 담았다.

Q1. 2023년 가을, 유럽 현지에서 급박한 공문이 날아왔을 때의 심정은 어떠셨습니까?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2023년 10월 당시, 저희는 유럽 현지 배터리 공장의 라인 증설 일정에 맞춰 ‘2차전지 소재 가공용 핵심 정밀 설비’를 적기에 제작하고 설치하느라 온 직원이 밤낮없이 매달리던 시기였습니다. 선적 스케줄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르는데, 갑자기 유럽 바이어 측에서 “10월 1일부터 CBAM 전환기간이 시작되니 분기별 탄소 배출량 데이터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요구를 해왔습니다.
데이터가 미비하거나 기한을 넘기면 통관 불이익은 물론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는 경고성 문구가 선명했습니다. 대기업처럼 환경 규제를 전담하는 팀이 따로 없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실무진 사이에서 “이러다 어렵게 따낸 유럽 수출길이 막히는 것 아니냐”는 극심한 위기감이 감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환경 규제 서류 앞에서 거대한 장벽을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Q2. 정밀 제어 설비라는 품목의 특성상, 초기 데이터 산정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공장에서 뿜어낸 탄소가 아니라, 장비 프레임에 들어간 원자재의 내재 배출량까지 쪼개서 적으라는 요구였습니다.” 결국 설계와 품질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들이 직접 규정집을 파고들어야 했습니다. 저희가 만드는 정밀 제어 설비는 강한 압력과 고속 구동을 견뎌야 하므로 특수 가공 강재와 알루미늄 부품이 대량 투입됩니다. 그런데 이 품목들이 하필 EU가 지정한 CBAM의 6대 집중 규제 대상에 정통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럽 집행위는 장비 조립 공정의 탄소뿐만 아니라, 제철소에서 원자재가 만들어질 때의 배출량까지 추적하라고 요구하더군요. 2023년 말 첫 보고 당시에는 국내에 축적된 데이터가 없다 보니 유럽이 임의로 지정한 ‘기본값(Default Value)’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본값은 우리 제조 현실보다 탄소가 훨씬 더 많이 나오는 것으로 계산되어, 초기에는 아주 억울하고 불리한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Q3. 탄소 데이터 산정만으로도 버거운데, 당시 유럽의 대러시아 철강 제재 조치까지 겹쳐 삼중고를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원천적인 위기는 무엇이었나요?
“원자재의 탄소량뿐만 아니라, 그 철강이 ‘러시아산이 아니라는 증명’까지 동시에 해내야 했습니다. 진짜 사투는 그때부터였습니다.” 탄소 데이터를 쪼개고 분석하느라 숨이 넘어가던 와중에, 유럽 바이어 측은 또 하나의 거대한 폭탄을 던졌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EU의 대러 제재 규정에 따라, “러시아산 철강 원자재를 사용한 제품은 유럽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으니 원산지 증명서(MTC, 원재료 시험성적서)를 제출하라”는 조치였습니다.
저희 정밀 설비 프레임과 특수 가공 부품에 들어가는 강재가 제철소에서 만들어질 때, 그 원료나 반제품(슬래브 등) 중 단 1%라도 러시아산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단순히 엑셀로 숫자를 맞추는 행정적 영역을 넘어, 공급망 전체의 ‘뿌리’를 추적해 청정성을 입증해야 하는 사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만약 하위 부품사 중 한 곳이라도 단가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러시아산 소재를 썼다면 설비 전체의 통관이 거부되고 수출길이 완전히 막힐 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품 협력사들의 원자재 구매 이력과 제철소의 원산지 증명서까지 샅샅이 뒤져가며 완벽한 ‘비(非)러시아산 공급망’을 증명해내야 했습니다.

Q4. 마땅한 산정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인데, 공급망(하위 협력사)을 설득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공장의 모든 전력 고지서를 뒤지고, 영세한 부품 협력사 사장님들을 찾아가 문전박대를 당해가며 데이터를 모았습니다.” 저희 설비는 대용량 모터와 공조 시스템을 가동해야 하므로, 조립 후 시운전 및 성능 테스트 과정에서 많은 전력(간접 배출, Scope 2)이 소모됩니다. 장비 한 대당 소비되는 전력량을 측정하기 위해 공장의 전력 고지서를 일일이 분석하고, 가동 시간으로 나누어 역산하는 눈물겨운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하위 협력사들이었습니다. 주물이나 임가공을 납품하는 영세 업체 사장님들을 찾아가 탄소 데이터와 원자재 증명서를 달라고 요청하면, “우리가 유럽에 직접 수출하는 것도 아닌데 왜 번거로운 서류를 요구하느냐”라며 불신 섞인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저희 실무진이 직접 찾아가 “이 데이터와 증명이 없으면 우리가 유럽에 장비를 못 팔고, 우리 장비가 못 나가면 사장님들의 물량도 끊긴다. 우리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나중에는 저희 직원이 협력사 공장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함께 데이터를 짜내고 원산지를 확인했습니다.
Q5.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이었는데, 2024년 대한민국 환경부의 지원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요.
“정부가 제시한 한국형 가이드라인과 국가 고유 배출계수를 도입하면서 비로소 안개를 벗어났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엑셀 전쟁 속에서, 2024년 대한민국 환경부가 국내 제조 현실을 정밀하게 반영해 고시한 ‘CBAM 가이드라인’과 한국형 배출계수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습니다. 모호했던 산정 방식이 한국 정부의 공신력 있는 기준으로 명확해지자 데이터 작성에 엄청난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의 일방적인 기본값을 적용했을 때보다, 환경부의 국가 고유 계수를 대입해 계산해 보니 우리 설비의 실제 탄소 배출량이 훨씬 적다는 점을 정량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럽 바이어들에게 “이것은 대한민국 환경부가 검증하고 보증하는 공식 데이터”라고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환경부가 배포한 중소기업용 템플릿 덕분에 하위 협력사들을 교육하기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이 양식의 빈칸에 전기 고지서와 세금계산서 수치만 넣으시면 됩니다”라고 구체적인 가이드를 주니 막연한 공포감을 덜었고, 덕분에 2024년 수출 물량부터는 한층 더 정밀하고 완벽한 탄소 보고서를 유럽 현지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Q6. 이 모진 사투 끝에 얻은 결실과, 향후 제품 설계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술력뿐만 아니라 유럽의 가장 까다로운 행정·환경 규제, 그리고 지정학적 공급망 리스크까지 다이렉트로 해결할 수 있는 독보적인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완벽한 CBAM 리포트와 원산지 증명서를 첨부하여 유럽 현지 배터리 공장에 설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자, 유럽 바이어들의 신뢰가 상상 이상으로 두터워졌습니다. 이는 곧바로 현지 내 추가 라인 증설 및 유럽 타 국가로의 추가 수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제품 설계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기계적 성능과 내구성만 보았다면, 이제는 설계 단계부터 구조를 최적화해 프레임 무게를 줄임으로써 철강 투입량(내재 탄소)을 낮추고, 가동 시 전력 효율을 극대화하는 ‘친환경 고효율 설계’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원자재 조달 단계부터 리스크가 통제된 청정 소재만 선별하는 눈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규제에 밀려 눈물로 시작한 사투였지만, 정부의 적절한 기준 제시와 우리의 끈기 있는 기술력이 결합하면서 결과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롱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 자산으로 세계 시장을 선도해 나가겠습니다.(대담=유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