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이제는 ‘거래’보다 ‘신뢰’가 먼저다

(사진 설명 : AI 이미지 컷)

정부가 마침내 자발적 탄소시장(VCM·Voluntary Carbon Market)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지난 27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출범한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얼라이언스’는 단순한 협의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사실상 한국 정부가 탄소를 미래 금융자산으로 공식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동안 국내 탄소감축 체계는 배출권거래제(K-ETS)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물론 배출권거래제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의 핵심 축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점점 경직됐다. 낮은 유상할당 비중과 공급 과잉은 가격 신호를 왜곡했고, 기업들은 감축 기술 투자보다 배출권 구매를 더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탄소가격이 ‘기후 행동의 유인’이 아니라 ‘규제 비용의 최소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시스템은 대기업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국가 배출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 스타트업, 지방자치단체, 산림·농업 기반 감축사업은 사실상 시장 밖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가 이번에 자발적 탄소시장 제도화를 꺼내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약 30%의 배출 영역을 시장 메커니즘 안으로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래량 확대가 아니다. 핵심은 ‘신뢰’다.

최근 글로벌 자발적 탄소시장은 혹독한 신뢰성 위기를 겪었다. 일부 산림 크레딧의 감축 효과 과장 논란과 부실 검증 문제가 불거지며 시장 전체가 흔들렸다. 탄소시장은 더 이상 “얼마나 줄였는가”만 묻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줄인 것이 맞는가”를 더 엄격하게 묻는다.

이 점에서 정부가 강조한 ‘법 기반의 등록·추적·소각 관리체계’ 구축은 올바른 방향이다. 탄소크레딧은 결국 금융자산이다. 금융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동성 이전에 신뢰다. 누가 발행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검증됐는지, 이중계산(double counting)은 없는지, 실제 감축이 장기간 유지되는지를 시장이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발적 탄소시장이 투기성 상품이 아니라 기업과 금융기관이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제도권 자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한국거래소(KRX)가 연말 개설을 추진하는 탄소크레딧시장 역시 단순한 거래 플랫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지금 세계 탄소시장은 ‘탄소 감축 경쟁’ 못지않게 ‘시장 인프라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누가 더 신뢰성 있는 등록·정산·검증 시스템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글로벌 자본과 유동성이 이동한다. 한국거래소가 글로벌 거래소 및 해외 등록기관과 연계에 나서는 이유도 결국 국제 신뢰도 확보에 있다.

특히 2027년 국제항공탄소상쇄·감축제도(CORSIA) 의무화와 파리협정 제6조 체계 본격화는 한국 시장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국제 기준과 정합성을 확보한다면 한국은 단순한 국내 거래시장을 넘어 아시아 탄소금융 허브로 성장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만 제도화 자체가 시장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발적 탄소시장은 본질적으로 민간의 신뢰와 자발적 참여 위에서 작동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시장을 경직시키거나 행정 중심으로 운영할 경우 혁신성과 유동성은 오히려 위축될 수 있다. 반대로 검증 기준이 느슨하면 글로벌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핵심은 ‘신뢰’와 ‘유연성’ 사이의 균형이다.

탄소는 더 이상 단순한 환경 의제가 아니다. 이제는 금융이고 산업이며 국가 경쟁력이다. 정부가 첫발을 내디딘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얼라이언스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순한 거래 규모가 아니다. 세계 시장이 믿고 참여할 수 있는 신뢰의 인프라다.

작성자 한국탄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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