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10조 이상 기업 회계장부에 박힌 탄소의 역설, 감축보다 공시 대응에 돈 다 쓸 판

(사진 설명 : AI 이미지)

탄소배출량이 투자·금융·공급망을 좌우하는 시대

기업의 회계장부에 ‘탄소’가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시대가 시작됐다. 앞으로 기업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냈는지만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고, 기후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며, 공급망의 탄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줄이고 있는지가 기업가치와 투자 판단의 핵심 기준이 될 전망이다.

[ESG 공시 최종안 확정] ‘탄소 회계’ 시대의 서막과 현장의 긴장감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8일 「지속가능성(ESG) 공시 제도화 방안(최종안)」을 확정하고, 2028년부터 연결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탄소배출량을 포함한 지속가능성 정보를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를 통해 의무 공시하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거래소 자율공시를 거치지 않고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를 기반으로 한 법정공시를 곧바로 시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글로벌 규제 흐름에 발맞춘 제도적 전환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시장의 준비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규제 속도전이라는 산업계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예상보다 빨라진 공시 로드맵

최종안은 지난 2월 발표된 의견수렴안보다 공시 범위가 크게 확대됐다. 당초 2028년 연결자산총액 30조 원 이상 기업부터 적용해 시행하려던 계획을 자산 10조 원 이상으로 대폭 낮춘 것이다. 이어 2029년에는 자산 5조 원 이상 기업으로 확대되고, 2028~2029년 운영 결과를 평가한 뒤 2030년에는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공시 대상 상장사의 종속회사를 포함하면 2028년 약 291개사, 2029년에는 약 3,171개사가 새로운 공시 체계에 편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ESG 공시가 일부 대기업의 자율경영이 아니라 국내 자본시장의 새로운 기본 공시체계로 자리 잡는 셈이다.

추정치 위주의 기후 정보가 유발할 법적 리스크

산업계가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대목은 자율공시 단계를 건너뛰고 자본시장법상 구속력을 가지는 사업보고서 공시로 직행한다는 점이다. 재무제표처럼 확정된 수치를 다루는 기존 공시와 달리, 기후 정보는 미래 예측과 가정을 기반으로 한 추정치의 비중이 높다. 이에 따라 중장기 탄소 감축 경로와 기후 리스크가 매출에 미칠 영향 등은 기온 상승 시나리오에 따라 결과값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 현행법상 사업보고서의 기재 오류나 누락은 과징금은 물론 경영진의 법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어, 기업들 사이에서는 초기 몇 년간 거래소 자율공시를 통해 시스템을 정비할 시행착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급망 탄소 측정의 한계와 스코프3 공시의 그늘

특히, 기업들이 가장 민감하게 바라보는 부분은 2031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될 가치사슬 전체의 온실가스 배출량인 스코프3(Scope 3) 공시다. 스코프3는 기업이 직접 배출하는 온실가스뿐 아니라 원재료 생산과 부품 제조, 물류, 제품 사용, 폐기에 이르는 공급망 전체의 배출량을 의미하며, 이는 현재 제조 대기업과 협력사 모두에게 거대한 암초로 다가오고 있다.

원자재 조달부터 임직원 출퇴근, 제품 폐기 단계까지 아우르는 특성상, 자체적인 탄소 측정 인프라가 없는 영세 협력사들의 데이터를 대기업이 취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의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공시 주체인 대기업이 부실 공시의 리스크를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적용 범위를 축소하거나 유예기간을 더 확충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힘을 얻고 있다.

기준 모호한 제3자 검증이 부추기는 비용 부담

2030년 도입 예정인 전문기관의 제3자 인증 제도 역시 실효성 논란에 직면해 있다. 검증의 범위와 책임 소재, 인증기관의 자격 요건 등이 여전히 불명확한 상태다. 이 때문에 제도 초기 비전문 기관의 난립으로 인한 인증 비용 급등 우려가 나온다. 실질적인 탄소 감축 예산보다 공시 대응과 컨설팅 비용에 더 많은 재원이 투입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당위성만큼 중요한 면책 제도의 실효성

정부도 이러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초기 3년간 고의성이 없는 오류에 대해 제재를 면제하고, 합리적 근거가 있을 경우 책임을 감면하는 세이프 하버(Safe Harbor)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형 기후리스크 플랫폼과 업종별 산정 가이드라인 구축 등 지원책도 내놓았다. 그러나 면책의 기준이 되는 합리적 근거 역시 해석의 여지가 넓어 기업들의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번 ESG 공시 의무화가 단순한 규제를 넘어 실질적인 탄소 저감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당위성만 앞세우기보다 현장의 수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교한 제도 보완이 시급해 보인다. (한국탄소신문=유명근 기자)

작성자 한국탄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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