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데이터센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력

(사진 설명 : AI 이미지)

자본시장연구원 이인형 선임연구위원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전환금융의 역할」 보고서를 중심으로

AI 산업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열렸다. 세계 각국은 초거대 AI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에 뛰어들고 있으며, 반도체와 AI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에 있지 않다. 그 막대한 전력을 누가, 어떻게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수백 메가와트(MW)에서 많게는 1기가와트(GW)에 이르는 전력을 소비한다. 이는 중소도시 하나가 사용하는 전력과 맞먹는 규모다. 데이터센터를 유치해도 전력이 부족하면 AI 산업은 성장할 수 없고, 그 전력을 석탄이나 LNG 발전에 의존한다면 탄소배출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ESG 공시 의무화와 RE100,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까지 더해지면서 전력 문제는 곧 산업 경쟁력의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탄소신문이 자본시장연구원 이인형 선임연구위원의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전환금융의 역할」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개념은 ‘전환금융(Transition Finance)’이었다. 보고서는 탄소중립의 핵심은 친환경 산업을 육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철강과 시멘트, 석유화학, 발전 등 기존 산업을 어떻게 저탄소 구조로 전환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석한다.

탄소는 여전히 기존 산업에서 나온다

정부의 「제1차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에 따르면 발전 부문은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7%, 산업 부문은 약 36%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탄소배출의 70% 이상은 발전과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기존 산업에서 발생한다. 결국 이들 산업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리 태양광과 풍력, 수소산업이 성장해도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와 2050 탄소중립 달성은 쉽지 않다.

문제는 기술보다 투자다

탄소를 줄이는 기술은 이미 상당 부분 개발돼 있다. 철강업계는 수소환원제철을 추진하고 있고, 발전업계는 탄소포집·저장(CCUS)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산업계는 고효율 설비와 전기화 공정을 확대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고효율 냉각시스템과 재생에너지 연계, 에너지저장장치(ESS), 송배전망 확충 등이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투자 규모다. 이러한 산업 전환에는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에 이르는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는 2023년부터 2027년까지 약 89조9천억 원을 투입하고 있지만, 보고서는 정부 재정만으로는 산업 전환에 필요한 자금을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결국 민간 금융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전환금융’

전환금융은 이름만 보면 기업을 지원하는 새로운 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제 개념은 조금 다르다.

기존 녹색금융은 태양광과 풍력, 수소처럼 이미 친환경 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이다. 반면 전환금융은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기업이라도 탄소를 줄이기 위한 설비 투자와 기술 혁신을 추진한다면 그 전환 과정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금융체계다.

예를 들어 철강회사가 석탄을 사용하는 고로를 수소환원제철 설비로 바꾸거나, 발전회사가 탄소포집설비를 설치하거나, AI 데이터센터 운영기업이 재생에너지 전력망과 ESS를 구축하는 경우 금융기관이 대출이나 채권 발행 등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다. 기업은 탄소 감축 목표와 이행 계획을 공개해야 하며, 목표를 달성했을 때만 낮은 금리나 금융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혜택도 줄어든다. OECD 역시 전환금융을 ‘신뢰할 수 있는 전환계획에 따라 넷제로 달성을 지원하는 금융’으로 정의하고 있다.

기업이 해야 할 일을 왜 금융이 지원하는가

전환금융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도 여기에 있다. 기업의 설비 투자와 탄소 감축은 원칙적으로 기업이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은행과 금융기관이 이를 지원해야 할까.

보고서의 논리는 명확하다. 탄소중립은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철강과 발전, 석유화학 산업이 저탄소 전환에 실패하면 탄소 감축 목표는 물론 수출 경쟁력과 일자리,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금융은 기업을 대신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저탄소 구조로 전환할 수 있도록 자금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사회적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전환금융이 대기업에 대한 특혜나 손쉬운 저금리 대출로 운영된다면 제도의 정당성은 흔들릴 수 있다. 따라서 엄격한 공시와 성과 평가, 인증 체계를 통해 실제 탄소 감축이 확인된 기업에만 금융 혜택이 제공돼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강조된다.

AI 시대, 금융도 국가 인프라가 된다

보고서가 발표된 2023년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이다. 이제 AI 경쟁력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많이 보유했느냐보다 이를 움직일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서 결정된다.

이를 위해서는 발전설비와 송배전망, ESS, 재생에너지, 차세대 원전 등 저탄소 에너지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결국 금융은 이러한 산업 전환과 에너지 전환을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의 역할을 하게 된다.

AI 시대에는 전력 경쟁력이 곧 산업 경쟁력이고, 산업 경쟁력은 결국 금융 경쟁력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전환금융의 의미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탄소중립의 승패는 금융이 아니라 ‘전환’에 달려 있다

이인형 선임연구위원의 보고서는 녹색금융만으로는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메시지는 금융 자체가 아니다. 금융은 어디까지나 산업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AI 시대 대한민국이 풀어야 할 과제는 데이터센터를 더 많이 짓는 것이 아니라 이를 움직일 전력망과 저탄소 산업 구조를 함께 구축하는 것이다. 전환금융도 기업을 대신해 비용을 부담하는 제도가 아니라, 기업이 탄소 감축이라는 약속을 책임 있게 이행하도록 유도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결국 탄소중립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돈을 지원하느냐가 아니라, 그 자금이 실제 산업 전환과 탄소 감축이라는 성과로 이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AI 시대 국가 경쟁력도 같은 원리다. 전력과 산업, 금융이 하나의 전략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탄소중립과 경제성장을 함께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 이인형 선임연구위원 보고서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시사점이다.(한국탄소신문=이정미 기자)

작성자 한국탄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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