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설명 : 오트마 에덴호퍼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PIK) 소장. 그는 EU ETS 개편안에 대해 “추가적인 유연성이 EU 기후정책의 전체적인 방향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평가했다. 사진=PIK(c))
PIK “2040 기후목표 향한 새로운 투자 신호”… 한국 기업도 탄소 전략 전면 재점검해야
유럽연합(EU)이 탄소배출권거래제(EU ETS)를 2040년 기후목표에 맞춰 전면 개편하면서 글로벌 탄소시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번 개편은 단순히 배출권 제도를 손질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탄소배출 감축(Reduction)’ 중심 정책에서 ‘탄소 감축과 탄소제거(Carbon Dioxide Removal, CDR)’를 함께 인정하는 새로운 시장 체계로의 전환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향후 세계 탄소시장과 각국의 배출권거래제, 기업의 넷제로 전략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최근 에너지, 에너지 다소비 산업, 항공 분야에 적용되는 EU ETS 개편안을 발표했다. 개편안은 국제 경쟁력이 중요한 산업에 대해서는 무상 배출권 할당을 기존 계획보다 보다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대신, 기업들이 실제 탈탄소 설비와 기술에 투자하도록 새로운 투자 조건을 도입했다.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투자 유인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영구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배출권거래제 안으로 편입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까지 탄소시장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에도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겠다는 의미다.
직접공기포집(DAC), 바이오에너지 탄소포집저장(BECCS), 바이오차(Biochar) 등 다양한 탄소제거 기술이 장기적인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세계적인 기후정책 연구기관인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PIK)의 소장 Ottmar Edenhofer는 이번 개편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에덴호퍼 소장은 “변화된 국제 경제와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유럽 산업에는 보다 큰 유연성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제도도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번 개편은 EU 기후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2040년 기후목표 달성을 위해 배출권거래제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탄소제거의 제도권 편입에 대해 “유럽에서 탄소제거 기술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장기 투자 기반을 처음으로 마련했다”며 “철강, 시멘트, 화학과 같이 현재 기술만으로는 완전한 탄소 감축이 어려운 산업의 잔여 배출을 보완하는 핵심 수단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제 탄소크레딧 활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다. EU 집행위원회는 파리협정 제6조에 따른 국제 탄소크레딧의 활용 가능성은 열어두되, 과거 품질이 낮은 크레딧이 시장 신뢰를 훼손했던 경험을 고려해 당장은 제한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에덴호퍼 소장은 “신중한 접근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제 탄소시장과의 연계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며 “고품질 국제 탄소크레딧이 확보된다면 EU ETS는 새로운 국제 기후협력과 탄소시장 발전을 이끄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개편안은 앞으로 유럽의회와 EU 이사회 협의를 거쳐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이후 회원국들은 산업 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전력 인프라 확충, 경쟁력 있는 전기요금 체계, 탄소제거 산업 육성 등 후속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EU ETS 개편은 한국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시행되는 가운데 EU 배출권시장의 변화는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력 등 대EU 수출 산업의 탄소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국제적으로 과학기반 감축목표(SBTi)와 ESG 공시 기준이 강화되는 흐름까지 더해지면서, 단순한 배출량 감축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의 요구를 충족하기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기업의 탄소 전략도 배출량 감축에 머무르지 않고 탄소제거 기술 투자, 고품질 탄소크레딧 확보, 공급망 전반의 탄소관리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넷제로 전략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번 EU ETS 개편은 단순한 제도 개정이 아니다. 이는 글로벌 탄소시장이 ‘배출을 줄이는 시장’에서 ‘배출을 줄이고 남은 탄소를 제거하는 시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변화다. 향후 국내 배출권거래제(K-ETS) 역시 이러한 국제 흐름을 반영한 제도 개선과 함께 탄소제거 기술의 시장 편입, 고품질 탄소크레딧 활용 체계 마련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한국탄소신문=유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