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탄소 농산물 1만4천 농가 시대, 농업 ‘Scope 3’ 시장 열리나

(사진 설명 : AI 이미지)
5년 새 인증농가 5,753호→1만4,124호… 인증면적 1만8,935ha로 2.8배 확대
2025년 온실가스 감축량 12만8,277톤(tCO₂-eq·이산화탄소환산톤)… 전체 농업면적의 1.3% 저탄소 인증
기업 탄소관리 공장에서 농장·공급망으로… ‘농업 탄소 데이터’ 새로운 가치로 부상
농산물의 경쟁 기준에 ‘탄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생산했는지, 얼마나 안전하게 생산했는지를 넘어 같은 농산물을 생산하면서 온실가스를 얼마나 적게 배출했는지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 중심에 ‘저탄소 농산물 인증제’가 있다. 친환경 또는 농산물우수관리(GAP) 인증을 받은 농산물 가운데 저탄소 농업기술을 적용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인 농산물에 부여하는 국가 인증이다. 현재 식량·채소·과수·특용작물·임산물 등 68개 품목이 대상이다. 정부는 생산·유통·소비를 연결해 농업 분야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하는 ‘시장기반형 감축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고 있다.
5년 새 2.5배… 저탄소 인증농가 1만4,124호
한국농업기술진흥원의 「2025년 저탄소 농산물 인증통계」에 따르면 2025년 12월 31일 유효인증 기준 저탄소 농산물 인증 농가는 1만4,124호로 집계됐다. 2021년 5,753호에서 2022년 8,098호, 2023년 9,085호, 2024년 1만1,028호를 거쳐 5년 만에 약 2.5배 규모로 늘었다. 2025년 한 해만 전년보다 28% 증가했다.
인증면적 증가세는 더 가파르다. 2021년 6,751ha였던 인증면적은 2025년 1만8,935ha로 약 2.8배 확대됐다. 같은 기간 온실가스 감축량도 8만205tCO₂-eq에서 12만8,277tCO₂-eq로 증가했다. 2025년 감축량은 전년보다 15% 늘었다.
농가 수와 인증면적, 감축량이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저탄소 인증제가 단순한 인증마크를 넘어 실제 농업 생산현장의 온실가스를 줄이는 정책수단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체 농업면적의 1.3%… 확대 여지는 크다
전체 농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낮다. 농진원 통계에 따르면 저탄소 인증면적이 전체 농업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21년 0.4%에서 2022년 0.6%, 2023년 0.7%, 2024년 1.0%, 2025년 1.3%로 높아졌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농업 전반으로 확산할 여지는 여전히 크다는 의미다.
정부도 저탄소 농축산물 시장 확대에 나서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30년까지 저탄소 인증농가 3만호, 연간 유통·판매량 5만톤, 소비자 인지도 95%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저탄소 인증의 핵심은 생산량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얼마나 적게 배출했는가’에 있다. 농진원은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비료·농약·농자재와 에너지 등을 절감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영농방법과 기술을 저탄소 농업기술로 규정하고 있다. 인증 과정에서도 재배현황 조사와 현장 방문, 증빙자료 수집 등을 거쳐 온실가스 배출량을 산정한다.
이 때문에 저탄소 인증제가 확대될수록 인증마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생긴다. 바로 농산물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농업 탄소 데이터’다.
기업 탄소관리, 공장에서 농장으로 넓어진다
농업 탄소 데이터의 중요성은 기업의 탄소관리 범위가 공급망 전체로 확대되면서 더욱 커지고 있다.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은 크게 Scope 1·2·3으로 나눈다. Scope 1은 공장이나 차량 등에서 기업이 직접 배출하는 온실가스이고, Scope 2는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과 열 등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간접배출이다.
Scope 3는 기업 밖의 공급망까지 포함한다. 원료 구매와 운송·유통, 제품 사용과 폐기 등 기업의 가치사슬에서 발생하는 다른 간접배출이다.
식품기업을 예로 들면 공장에서 사용하는 연료와 전력만 줄여서는 제품 전체의 탄소배출을 관리하기 어렵다. 쌀·콩·고추·과일 같은 원료를 생산하는 농장에서도 비료와 농자재, 농기계 연료와 시설에너지가 사용되고 온실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탄소관리가 공장 담장을 넘어 원료가 생산되는 농장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 탄소회계도 이제 ‘농장’을 본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적인 기업 탄소회계에서도 구체화되고 있다.
GHG Protocol(온실가스 프로토콜)은 기업이 얼마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지 계산하고 보고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국제 탄소회계 기준이다. 기업의 온실가스를 Scope 1·2·3으로 구분하는 방식도 이 체계를 통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GHG Protocol은 2026년 1월 농업과 토지 분야를 다루는 ‘토지부문 및 탄소제거 기준(Land Sector and Removals Standard·LSR)’을 발표했다.
쉽게 말하면 기업이 사용하는 농산물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까지 기업의 ‘탄소장부’에 어떻게 계산하고 기록할 것인지에 대한 국제적인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농업은 제조업과 탄소배출 구조가 다르다. 비료 사용에서는 아산화질소가 발생하고 벼 재배와 축산에서는 메탄이 나온다. 반대로 토양이나 나무에는 탄소가 저장될 수도 있다.
새 기준은 이처럼 농업 생산과 토지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과 탄소제거를 기업의 탄소회계에서 일관되게 측정·보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기업 탄소회계의 경계가 공장 굴뚝과 전력 사용량에서 농장과 토지로까지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인증마크 넘어 ‘농업 탄소 데이터’가 자산으로
이러한 국제적 변화는 국내 저탄소 농산물 인증제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기업이 수많은 농가에서 구매하는 농산물의 온실가스 정보를 개별적으로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비료를 얼마나 사용했는지, 농기계 연료와 시설에너지는 얼마나 소비했는지, 어떤 재배기술을 적용했는지 등 생산현장의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 저탄소 인증 과정에서는 농가의 재배현황을 조사하고 현장 방문과 증빙자료 수집 등을 거쳐 온실가스 산정보고서를 작성하는 절차가 이미 운영되고 있다.
앞으로 이 데이터를 기업 탄소회계에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발전시킨다면 저탄소 농산물은 단순한 인증상품을 넘어 기업 공급망의 탄소정보를 제공하는 기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장기적으로는 인증마크 자체보다 그 뒤에 축적되는 신뢰할 수 있는 농업 탄소 데이터가 더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저탄소 인증=Scope 3 감축’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다. 기업이 저탄소 인증 농산물을 구매했다고 해서 해당 물량이 곧바로 기업의 Scope 3 감축실적으로 자동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 탄소회계에 농업 생산단계의 배출량이나 감축 성과를 반영하려면 데이터 품질과 추적성, 산정범위와 방법 등이 국제기준의 요건에 맞아야 한다.
따라서 국내 저탄소 인증에서 만들어지는 탄소정보를 기업의 Scope 3 관리와 연결하려면 산정방법과 데이터 품질, 추적·검증체계를 국제 탄소회계 기준과 맞춰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연결이 가능해진다면 저탄소 인증제의 역할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소비자에게 ‘탄소를 적게 배출한 농산물’을 알려주는 표시제도를 넘어 식품·유통기업의 공급망 탄소관리를 지원하는 데이터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민이 줄인 탄소, 농가소득으로 돌아와야
궁극적인 과제는 농민이 생산현장에서 줄인 탄소를 어떻게 경제적 가치로 돌려주느냐다.
저탄소 농업을 실천하려면 비료와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새로운 재배기술을 적용하는 등 영농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에 시장의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확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식품·유통기업이 공급망 탄소관리를 위해 저탄소 농산물 구매를 확대하고 장기계약이나 저탄소 농업기술 도입 지원 등에 참여한다면 기업에는 공급망 탄소관리 수단이 생기고 농민에게는 안정적인 판로와 경제적 보상이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소비자의 수요가 저탄소 농업을 확대하고, 확대된 생산이 다시 시장을 키우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1만4천 농가는 시작… 농업의 새로운 경쟁력 ‘탄소 생산성’
2025년 저탄소 인증농가 1만4,124호, 인증면적 1만8,935ha, 온실가스 감축량 12만8,277tCO₂-eq. 국내 농업에서도 탄소감축을 수치로 측정하고 관리하는 영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숫자다.
그러나 전체 농업면적에서 저탄소 인증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직 1.3%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인증농가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농민이 만들어낸 감축 성과를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보상할 것인가다.
그동안 농업 생산성은 같은 면적에서 얼마나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느냐를 중심으로 평가돼 왔다. 탄소중립 시대에는 또 하나의 기준이 더해질 수 있다. 같은 농산물을 생산하면서 얼마나 적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가, 즉 ‘탄소 생산성’이다.
농민이 줄인 탄소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그 데이터가 기업의 공급망 탄소관리와 연결되며, 저탄소 농산물 구매 확대를 통해 경제적 가치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간다면 저탄소 농산물 인증제는 하나의 국가인증을 넘어 농업과 기업의 탄소중립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다.
1만4천 농가 시대는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농민이 줄인 탄소를 어떻게 가치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다시 농촌으로 돌려줄 것인가. 저탄소 농업이 농촌 탄소중립의 실질적인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는 이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달려 있다. (한국탄소신문=유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