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 이제 탄소를 줄이는 시대를 넘어 탄소를 생산하는 시대다

(사진 설명 :AI 이미지)

지난 4월 정부는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Voluntary Carbon Market, VCM) 얼라이언스’​를 출범시키고 자발적 탄소시장법 제정과 한국거래소 내 탄소크레딧 거래시장 구축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어 한국거래소를 중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거래 플랫폼을 마련하고, 기업과 금융권, 산업계가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탄소시장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거래시장을 하나 만드는 정책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탄소정책이 규제 중심에서 시장 중심으로 진화하는 전환점이며, 탄소감축을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바꾸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동안 우리나라 온실가스 감축의 중심은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Korea Emissions Trading Scheme, K-ETS)​였다. 2015년 시행된 K-ETS는 대규모 배출기업의 감축을 유도하는 핵심 제도로 자리 잡았지만, 제도 밖에 있는 수많은 감축 주체까지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농업과 임업, 해양, 지방자치단체는 온실가스를 줄여도 이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형 VCM은 바로 이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한 시장이다. 규제 대상이 아닌 기업과 농가, 산주, 지방자치단체 등이 온실가스를 감축하거나 탄소를 흡수한 실적을 검증받아 탄소크레딧으로 발급받고 이를 필요한 기업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다시 말해 거래되는 것은 탄소 자체가 아니라 ‘감축 성과’이며, 감축 노력이 새로운 자산으로 인정받는 시장경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시장이 열리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기업의 경영 방식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간접배출인 스코프 3(Scope 3) 관리에 나서고 있다. 앞으로는 제품의 가격과 품질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했는지가 수출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다. 탄소는 더 이상 환경 담당 부서만의 업무가 아니라 기업의 투자와 구매, 생산, 수출 전략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농업도 새로운 기회를 맞는다. 저탄소 농법을 적용하고 논에서 발생하는 메탄을 줄이며, 바이오차를 활용하거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농가는 앞으로 농산물뿐 아니라 탄소크레딧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된다. 농업의 경쟁력은 생산량뿐 아니라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생산했는가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임업은 한국형 VCM의 가장 큰 수혜 분야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숲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조림과 숲가꾸기를 확대하며, 목재를 장기간 이용하는 활동은 모두 탄소흡수와 저장 효과를 높인다. 지금까지 산림은 공익적 기능이 강조됐지만 앞으로는 탄소를 흡수하는 경제적 자산으로도 평가받게 될 것이다. 산주는 목재뿐 아니라 탄소흡수라는 새로운 가치를 함께 생산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도시숲 조성, 폐기물 자원화, 바이오가스 생산, 하수처리시설 개선, 블루카본 사업 등 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감축사업을 발굴하면 지역경제 활성화와 탄소중립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탄소는 이제 중앙정부만의 정책이 아니라 지역의 새로운 성장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은 거래소만 만든다고 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다. 세계 자발적 탄소시장은 최근 일부 저품질 크레딧과 그린워싱 논란으로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실제보다 감축량을 과장하거나 동일한 감축 실적을 중복 발급하는 시장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한국형 VCM이 성공하려면 국제 기준에 맞는 측정·보고·검증(Monitoring, Reporting and Verification, MRV) 체계를 갖추고, 발급부터 거래, 소각까지 전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

한국거래소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거래량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시장의 신뢰를 높이는 것이 본질이다. 공정한 거래 기준과 가격의 투명성, 안정적인 결제 시스템을 갖춘 거래 플랫폼이 마련되어야 국내 기업은 물론 해외 투자자도 한국 탄소크레딧을 신뢰할 수 있다.

앞으로는 국제항공 탄소상쇄·감축제도(Carbon Offsetting and Reduction Scheme for International Aviation, CORSIA) 와 ​파리협정 제6조 등 국제 제도와의 연계성도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VCM 시대에는 기업만 준비해서는 안 된다. 농민은 농산물과 함께 탄소를 생산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산주는 숲을 탄소자산으로 관리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의 자연자원과 산업을 활용한 탄소사업을 발굴해야 하며, 금융권은 탄소를 새로운 투자자산으로 평가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정부 역시 감축사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고품질 탄소크레딧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탄소중립은 더 이상 환경정책만으로 달성할 수 없다. 산업과 금융, 농업과 임업, 지역경제가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국가 전략이다. 한국형 자발적 탄소시장은 그 변화를 시작하는 제도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거래소 개장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 탄소를 경쟁력으로 만들고, 얼마나 많은 농민과 산주가 탄소를 새로운 소득으로 연결하며, 얼마나 많은 지역이 탄소를 미래 산업으로 키워내느냐다. 탄소를 줄이는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이제는 탄소의 가치를 생산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작성자 한국탄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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