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설명 : 캘리포니아는 탄소배출권 경매 수익을 청정에너지와 교통, 주택, 산림 등 기후투자에 활용하고 있다. 사진은 2026년 캘리포니아 기후투자 연례보고서에 소개된 주요 사업 모습. 자료=California Climate Investments)
캘리포니아·퀘벡 8월 19일 제48차 공동 탄소배출권 경매 실시
워싱턴주까지 시장 연결 추진…버지니아 7월 RGGI 복귀
국제 기후외교는 후퇴, 지역 탄소시장은 확대…‘두 개의 미국’ 뚜렷
미국이 국제 기후체제에서는 빠르게 후퇴하고 있지만 미국 안의 탄소시장은 멈추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파리협정에 이어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서도 탈퇴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캘리포니아와 캐나다 퀘벡은 지난 19일 제48차 공동 탄소배출권 경매를 실시했다.
미국 동부에서는 한때 지역 탄소시장에서 탈퇴했던 버지니아가 지난 7월 다시 복귀했고, 서부에서는 캘리포니아·워싱턴주·퀘벡을 하나의 탄소시장으로 연결하는 작업까지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인 기후외교에서는 미국이 뒤로 물러나는 반면 미국 내부에서는 주정부를 중심으로 탄소가격제와 배출권거래제가 계속 작동하는 이른바 ‘두 개의 미국 기후정책’이 뚜렷해지고 있다.
트럼프의 기후체제 이탈, 파리협정 넘어 UNFCCC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7일 UNFCCC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협약에서 미국이 탈퇴하도록 하는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UNFCCC는 1992년 채택된 국제 기후변화 대응의 기본 협약으로 파리협정 역시 이 체제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UNFCCC 탈퇴는 파리협정에서 빠지는 것보다 한 단계 더 근본적인 국제 기후협력 체제 이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에 유럽연합(EU)은 세계 최대 경제국이자 세계 2위권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이먼 스티엘 UNFCCC 사무총장도 국제 기후협력에서 물러나는 것이 미국의 경제와 일자리에도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 1월 27일 파리협정에서 공식 탈퇴했다. 국제 기후외교만 놓고 보면 미국의 정책 방향은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적인 탄소감축 협력보다는 화석연료 생산과 에너지 공급 확대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부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트럼프가 떠나도 탄소배출권 경매는 열렸다
대표적인 곳이 캘리포니아다. 캘리포니아와 퀘벡은 지난 8월 19일 제48차 공동 탄소배출권 경매를 실시했다. 두 지역은 이미 탄소시장을 연결해 공동경매를 운영하고 있다.
8월 21일 현재 이번 경매의 최종 낙찰가격 등 세부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연방정부의 기후정책 변화와 관계없이 북미의 대표적인 탄소배출권 시장이 예정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목된다.
캘리포니아는 탄소배출권 제도를 기존 ‘Cap-and-Trade’에서 ‘Cap-and-Invest’로 개편하고 운영기간도 2045년까지 연장했다. 지난 5월에는 캘리포니아 대기자원위원회(CARB)가 2030년과 2045년 기후목표에 맞춰 제도를 다시 손질했다. 캘리포니아의 이 제도는 주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80%를 포괄한다.
연방정부가 국제 탄소감축 체제에서 빠지는 동안 미국 최대 주정부에서는 오히려 탄소가격을 장기간 경제 시스템 안에 남겨두는 선택을 한 셈이다.
캘리포니아·워싱턴·퀘벡, 하나의 탄소시장 추진
더 주목되는 것은 시장의 확대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 캐나다 퀘벡은 지난 6월 25일 세 지역의 탄소시장을 연결하기 위한 협정에 서명했다. 현재 캘리포니아와 퀘벡은 이미 연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워싱턴주의 Cap-and-Invest 시장을 추가하는 것이다.
각 지역의 법령과 규정 개정 등 후속 절차가 완료되면 2027년부터 세 지역을 연결하는 시장 운영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계가 완료되면 세 지역 기업들은 동일한 시장에서 배출권을 거래할 수 있고 공동 경매와 공통 탄소가격 형성도 가능해진다.
미국 연방정부가 국제 기후협력에서 이탈하는 시기에 미국 주정부가 캐나다 지방정부와 국경을 넘어 탄소시장을 확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부에서는 버지니아가 탄소시장으로 돌아왔다
서부뿐만 아니다. 미국 동부의 대표적인 탄소배출권 시장인 RGGI(Regional Greenhouse Gas Initiative·지역온실가스이니셔티브)에도 올해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버지니아는 지난 7월 1일 RGGI 참여를 공식 재개했다.
버지니아는 2021년부터 RGGI에 참여했다가 2023년 탈퇴했지만 올해 다시 시장에 돌아왔다. RGGI 공식 자료에 따르면 버지니아에는 올해 하반기 1,148만 개의 배출권이 배정됐다. 이 물량은 오는 9월 9일과 12월 2일 예정된 경매에서 기존 10개 참여주의 물량에 추가된다.
RGGI는 발전소의 이산화탄소 배출총량을 제한하고 배출권을 경매·거래하는 미국 최초의 의무적 지역 탄소시장이다. 즉 미국에서는 서부의 캘리포니아·워싱턴과 동부의 RGGI라는 두 개의 큰 지역 탄소시장 축이 연방정부 정책과 별개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의 미국, 두 개의 기후정책’
2026년 미국의 상황은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워싱턴의 연방정부는 파리협정에서 탈퇴했고 UNFCCC에서도 떠나려 한다. 반면 캘리포니아에서는 사흘 전에도 탄소배출권 경매가 열렸고, 워싱턴주는 캘리포니아·퀘벡 시장과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 동부에서는 버지니아가 RGGI로 돌아왔다.
미국 전체가 탄소중립에서 떠나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오히려 연방정부의 기후외교와 주정부의 탄소경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탄소시장은 정치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국의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탄소시장은 정부의 탄소중립 선언만으로 만들어지는 시장이 아니다. 기업의 감축투자와 배출량 측정, 검증, 배출권 거래, 금융 그리고 장기간 축적된 시장 신뢰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의 기후정책이 크게 바뀌었음에도 일부 주정부의 탄소가격 체계와 시장 인프라는 계속 작동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시장의 지리적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한국도 국가 배출권거래제를 운영하면서 자발적 탄소시장(Voluntary Carbon Market·VCM)의 제도화와 새로운 탄소시장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정권과 기후정책이 바뀌어도 한번 구축된 탄소시장은 독립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 기후체제 이탈과 미국 주정부들의 탄소시장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는 2026년, 미국은 그 질문에 대한 거대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국제 기후체제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미국의 탄소경제까지 멈춘 것은 아니다. / 유명근 기자